2022. 3. 27. 15:06ㆍ카테고리 없음
수신에서 무과시험 과목으로
한반도에 활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5,000년 경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듯이 활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무기이자 놀이거리였다.
전통시대에 활쏘기란 단순히 무예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무인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예기(禮記)』에 ‘활쏘기는 인(仁)의 길이다. 활쏘기는 바르게 되는 것을 몸에서 구한다’고 했듯이, 활쏘기는 고대로부터 군자의 중요 교과목으로 꼽힌 육예(六藝 : 禮·樂·御·書·數·射)의 하나였다. 그래서 수신의 방편으로 활쏘기를 중시했다.
조선시대 초기에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자 신하들이 학업에 힘써야 한다면서 만류했다. 그러자 태종은 “옛사람이 이르기를 ‘활 쏘는 것으로 덕을 알아본다’고 했고, ‘그 재주를 겨루는 것이 군자의 길이다’고 했으니 활쏘기를 그만두게 할 수 없다”면서 강행했다.
이렇듯 활쏘기가 선비에게 덕을 측정하는 지표였다면, 무장에게 적용될 때에는 실력을 측정하는 지표였다. 화살을 장전하고 활을 당기는 것은 무장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이자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무장을 선발하는 과거시험인 무과(武科)는 고려 예종 및 공양왕 대에 시행된 적이 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착됐다. 조선에서 1402년(태종 2) 처음 실시한 무과는 시험과목으로 실기와 이론이 있었다.
식년시(式年試 : 60갑자 가운데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드는 해에 정기적으로 치룬 과거시험)를 기준으로 실기 과목을 꼽아보면 목전·철전·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騎槍)·격구가 있다. 여섯 과목 중 목전·철전·편전·기사 네 과목이 활쏘기다. 임진왜란 이후로 실기 과목은 목전·철전·편전·기추(騎芻)·관혁·기창·유엽전·조총·편추(鞭芻)로 바뀌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뼈아픈 자각으로 조총이 포함됐으나, 관혁과 유엽전이 신설되는 등 여전히 활쏘기 비중이 높았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무장이 되려면 활쏘기 기량이 필수임을 보여준다.
천하무적의 활, 편전
무과의 과목에서 활쏘기는 두 유형으로 나뉜다. 멀리 쏘는 것을 측정하는 과목과 정확하게 과녁을 명중시키는 것을 측정하는 과목이다. 편전은 후자에 속한 활쏘기로 일정 거리에서 3발을 쏘아 1발을 맞출 때마다 점수를 부과했는데 표적의 정중앙을 맞추면 두 배의 점수를 주었다.
편전은 애기살 또는 통전(筒箭)이라 하며, 길이가 매우 짧아 보통 화살의 ⅓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통아(桶兒)라는 발사대에다 놓고 쏘았다. 그런데 이 화살이 대단했던 것이다. 성호 이익은 우리나라의 장기로 편전을 꼽으면서 “튀어나가는 힘은 먼 거리에 미치고, 뚫고 들어가는 힘도 매우 억세어 적들이 이 편전을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편전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그래서 중국의 창이나 일본의 총과 함께 천하무적이 됐다”고 극찬하면서, 태조 이성계가 편전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놓았다.
조선인의 편전 실력은 외국에서도 유명했다.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조선 사신이 방문하면 편전 쏘는 것을 일부러 청할 정도였다. 1712년(숙종 38) 청나라 임금은 조선의 사절단이 오자 일행 중에 활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초청해 편전을 쏘게 했다. 그런 다음 조선 사절단에게 본인의 활솜씨와 함께 시위 무인들의 활솜씨를 선보였다. 나중에 이 말을 전해들은 조선 사절단의 수행 군관 최덕중은 그날 일기에다 이렇게 적었다.
일본인도 감탄한 마상 활쏘기
편전이 중국대륙을 놀라게 했다면 일본 열도를 감탄시킨 것은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자유자재로 날리는 기예였다. 바로 기사(騎射) 또 는 기추(騎芻)다. 기사는 무과시험의 과목으로 둥근 표적을 맞추는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 허수아비를 쏘아 맞추는 기추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한시각이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중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에는 기추를 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위쪽의 그림은 1664년(현종 5) 함경도 길주에서 시행한 별시 과거시험을 담은 기록화다.
그림을 보면 양쪽으로 허수아비 표적 5개를 각각 세워 놓았고, 표적 1개당 채점을 위해 4명을 배치했다. 붉은 깃발과 흰색 깃발을 든 사람 뒤로 두 명이 더 앉아 있다. 가운데에는 몸을 돌려 왼편 허수아비 표적을 향해 활을 쏘는 응시자의 모습이 보인다. 기추의 시험 방식은 지그재그로 왼편과 오른편을 번갈아 쏘았다. 기추는 과녁을 정확하게 쏘는 것 못지않게 시간도 중요했다. 그래서 제한 시간을 넘기면 감점을 당했다. 그만큼 숙련도가 중요했던 것이다.
조선인들이 말을 달리면서 허수아비 표적을 맞추는 활솜씨는 일본인 눈에도 장관이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활쏘기 기예를 보여주었다.
1748년(영조 24)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일행 중 군관들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 앞에서 말 타고 활쏘는 기예를 선보였다. 그중 군관 이일제의 활솜씨가 대단했던 모양인지 모두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다 한다.
남녀노소 모두 즐기는 스포츠, 활쏘기
무과시험 과목 중에 격구가 있다. 격구는 오늘날 폴로 경기와 유사한 스포츠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막대기로 공을 쳐서 상대방 구문에 넣는 경기다. 걸어서 하는 격구도 있다. 골프처럼 넓은 마당에 구멍을 파놓고 걸어 다니면서 구멍에 공을 쳐서 집어넣었다.
조선시대에 격구를 사랑한 임금으로 제2대왕 정종이 유명하다. “전하께서 격구를 낙으로 삼으신다”는 지적을 들을 만큼 격구를 좋아한 정종은 수시로 궁궐 뜰에서 격구를 했다. 어느 때에는 이틀 연달아 격구를 하는 바람에 신하들의 우려를 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격구는 점차 비판에 직면했다. 놀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으로 탈바꿈해 무과의 과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효용성이 문제였던지 무과 과목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정조가 『무예도보통지(1790년)』를 편찬할 무렵에 격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지적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이에 비해 활쏘기는 조선시대 내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궁궐에서는 국왕과 신하들이 모여 활솜씨를 겨루었다. 지역에서는 향사례(鄕射禮)라 해서 마을의 풍속을 바로 잡기 위한 모임으로 활쏘기를 했다.
활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공동체를 엮어주는 체육활동으로, 내기하면서 즐기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송단호시(松壇弧矢)>라는 시에서 ‘내기 활쏘기에 사방 이웃이 온통 비었네(四隣賭射巷全空)’하고 읊었다. 미국 학자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 1858∼1929)은 『한국의 놀이』에서 활쏘기를 ‘편사하기’(편을 짜서 활쏘기)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또 개화기 이후 외국인들이 남긴 사진 중에는 여성들이 활 쏘는 모습이 담겨있다.
활쏘기가 우리 민족의 사랑을 폭넓게 받은 이유는 다양성에 있다. 활은 무력을 상징하는 무기였다. 무장이 되려면 활쏘기는 필수로 갖추어야 할 기량이었다. 그러면서도 활쏘기는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체육인 동시에 시합으로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의 문화 유전자가 되어 오늘날 세계적으로 한국의 양궁이 이름을 떨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글 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